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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변잡기

[패러디] 문방사우쟁론기(文房四友爭論記)

by 오예성 2021. 4. 12.

이른바 문방사우(文房四友)는 글하는 자의 신하(臣下)이자 벗이니, 약관(弱冠)이 채 안된 학생이라 하나 어찌 벗이 없으리오.

문방사우란 관례로는 지필묵연(紙筆墨硯)를 이르나, 누대(累代)에 걸친 세습(世襲)으로 점차 구성이 변하여 종이, 연필, 지우개, 필통을 이르게 되었다. 근래(近來) 성상(聖上)께서 친히 명호를 내리시어, 종이를 백면서생(白面書生), 연필을 흑심장군(黑心將軍), 지우개를 회백공(回白公), 필통을 허통대감(虛桶大監)이라 하였다. 이로써 사우(四友)가 글월의 대소사(大小事)를 논하게 되었으니 어찌 홍복(洪福)이 아니겠는가.

일일(一日)은 사우(四友)가 모여 중난(重難)을 형통(亨通)하게 하려 하였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어심(御心)이 그들을 떠날 것 같다 저들끼리 추측하였기 때문이다. 먼저 백면서생이 하얀 낯을 기울이며 이르되,

대관절 어찌하여 어심을 논하는 것입니까? 성상의 어지심이 변함이 없으시고 우리가 도리(道理)에 어긋나는 언행(言行)을 하지 않았는데 총애를 거두실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흑심장군이 첨예(尖銳)한 끝을 세우며 이르되,

서생의 말은 순진하기 그지없다. 기해(己亥)년에 타자기(打字機)라는 기물(奇物) 들여와 이미 성상께서 즐겨 쓰기거늘 다급히 방도를 강구(講究)하지 아니하면 성상께서 서예(書藝)의 지극한 도를 멀리 할까 저어되는 바이다.”

회백공이 검게 변한 백면서생의 낯을 닦아주며 이르되,

장군의 말이 과하다. 재 아무리 편리한 기물(奇物)이라 할지라도 성상의 업()에는 무용(無用)하지 않은가? 더군다나 붓이 졸한지 수년이 넘었는데 그 없이 서예를 논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 아니겠는가?”

그러자 허통대감이 크게 한숨 쉬며 말하기를,

필화백(筆 畫伯/筆花 伯)이 그립구나! 진실로 그의 서체(書體)는 왕희지(王羲之)와 같았고 시화(詩畫)은 두보(杜甫)와 장승요(張僧繇) 같았도다. 또 그의 인덕(仁德)은 백이(伯夷), 숙제(叔齊)와 같았으니 풍속이 박하고 오직 권신(權臣)이 되기만을 좇는 요즘 젊은이들은 마땅히 부끄러움을 알아야 할 일이다.”

백면서생이 답하기를,

합하(閤下), 우리가 충후(忠厚)한 기풍(氣風) 만들면 자연히 정학(正學)을 따르는 자도 늘어나지 않겠습니까.”

흑심장군이 그 말을 듣고 반박하며 이르되,

서생, 그대의 말은 탁상공론(卓上空論)에 불과한 말이다.”

장군이 다시 말을 이으며,

허통 합하(閤下), 근래에는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말이 무색하여 입신양명(立身揚名)하기가 화중지병(畵中之餠)같으니 비단 그들만의 잘못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필화백께서 타국에게 송양(宋襄)의 인()을 베풀지 아니하셨더라면 일어나지 않을 과가 많으니, 때에 맞지 않은 인덕은 화()가 되기 마련이라 하겠습니다.”

허통대감이 대노하여 이르되,

일개 무부(武夫)가 무엇을 알겠는가. 네가 부월(斧鉞) 들고 싶어 하는 것은 알고 있다. 허나 망령되이 선정(先正)의 덕을 깎아내려 네 소원(所願)을 이루는 것은 통하정(通下情) 즐겨 하시는 성상께서도 가납(嘉納)하지 아니할 것이다. 일찍이 썩은 나무로는 조각을 할 수 없다(朽木 不可雕也) 하였는데 네가 참으로 이와 같구나.”

회백공이 만류하며 이르되,

양우(兩友)는 다투지 말라. 붓의 공과(功過)에 대해 포폄(褒貶)하지 않기로 함을 벌써 잊었는가. 또 속언(俗言)에 친할수록 예를 지키라 하는 말처럼 친우들은 서로에게 예를 갖추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사우가 이렇듯 당무(當務)를 보며 익정(翼政)하고 있었는데 성상(聖上)께서 마침 회()를 친견(親見)하러 오시었다가 그 말을 듣고 하교(下敎)하시기를,

일찍이 문선왕(文宣王, 공자)께서 군자는 잘못을 스스로에게서 찾고, 소인은 남에게서 찾는다(君子求諸己, 小人求諸人)고 하시었다. 그러니 사우(四友)의 다툼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만하다. 더하여 흑심장군은 다른 자들을 모함하기를 즐겨하여 벌열(閥閱)의 이름에 누를 끼쳤으니 당분간 허통의 집에서 나와서 과인이 흑심이라는 명호를 내린 연유(緣由)를 숙고하고 있으라. 그리고 흑심이 맡던 위()는 첨필(尖筆)이라는 자에게 맡기도록 하겠다.”

그러자 추상(秋霜)같이 내려온 옥음(玉音)에 사우가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읍()하고 물러나더라.

 

- 원본: 규중칠우쟁론기ko.wikisource.org/wiki/%EA%B7%9C%EC%A4%91%EC%B9%A0%EC%9A%B0%EC%9F%81%EB%A1%A0%EA%B8%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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